쓰가루 야스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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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가루 야스치카는 구로이시 번의 5대 번주 쓰가루 아키타카의 장남으로, 1765년에 태어났다. 그는 1778년 구로이시 영지의 영주 자리를 계승했으며, 1791년에는 히로사키 번의 번주 쓰가루 노부아키의 양자가 되어 번주 자리를 물려받았다. 야스치카는 번의 재정을 확충하고 개혁을 추진했으나, 1793년 지진과 쓰나미, 1813년 농민 반란 등 어려움을 겪었다. 1805년 에조치 경비의 공적으로 영지가 7만 곡으로 증가했고, 1809년에는 구로이시가 정식 번으로 승격되었다. 1821년에는 라이벌 모리오카 번의 사무라이들에게 암살 시도를 당하기도 했다. 1825년 은퇴하여 하이쿠 시를 짓다가 183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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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야스치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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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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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쓰가루 야스치카 (津軽寧親) |
출생 | 1765년 3월 8일 |
출생지 | 일본 구로이시 |
사망 | 1833년 7월 30일 |
사망지 | 일본 에도 |
국적 | 일본 |
직업 | 다이묘 |
가문 | |
씨족 | 쓰가루 씨 |
아버지 | 쓰가루 아키타카 |
어머니 | 구로다 나오즈미의 딸 |
양아버지 | 쓰가루 노부아키라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데와노카미, 엣추노카미, 종4위하 시종, 우쿄다이부, 추증 종3위 |
경력 | |
역임 | 히로사키번 다이묘 (1791년–1825년) |
전임 | 쓰가루 노부아키라 |
후임 | 쓰가루 노부유키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스기우라 마사카쓰의 딸, 후쿠히메 |
측실 | 고엔인, 게이호인, 미쓰조인, 하루노, 다카세 외 다수 |
자녀 | 노리아키, 노부유키, 안도 노부요시 정실, 호리 나오토모 정실, 모리 다다테루 정실 |
형제자매 | 스기우라 도시타케, 호조 우지카타 실, 이마오지 마사토미 실 |
양형제 | 시바타 가쓰미네 실 |
기타 정보 | |
휘 | 와사부로(幼名) → 세이호 → 야스치카 |
아호 | 고요칸, 고슈 |
하이호 | 뇨잔, 세이카쿠, 긴테이 |
시호 | 조센인덴토오쇼슌쿄다이코지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우에노사쿠라기의 지쓰료인 |
2. 생애
메이와 2년(1765년) 1월 17일, 무쓰 국 히로사키 번 분가인 구로이시 영 5대 당주 쓰가루 아키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에이 9년(1780년) 11월 18일,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오메미에하였다. 간세이 3년(1791년) 8월 28일, 노부아키가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서 뒤를 이었다. 같은 해 10월 1일,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알현했다.[1] 같은 해 12월 16일, 종5위하·데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번정에서는 노부아키의 개혁을 이어받아 몇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타 번으로부터 이민 개척자를 구하기 위해 인요리역을 설치했으며, 간세이 8년(1796년)에는 번교·게이코칸을 창설했다. 간세이 9년(1797년)에는 번의 법령 『간세이 율』을 제정하는 등 노력했지만, 노부아키 시대에 행해지던 무사에 의한 반농 농촌 부흥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간세이 4년 12월 28일(1793년 2월 8일), 니시쓰가루 지진이 발생하여 영내에 피해가 발생했다.
분카 2년(1805년), 에조치 경비에서의 공적[1]으로, 막부의 허가에 의해 다카오시가 행해져 7만 석, 후에 1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분카 6년(1809년)에는, 지번인 구로이시번을 입번했다. 그러나 형식상의 세입(표고)이 늘었다고 해도 신규 영지가 늘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입은 그대로 "10만 석의 다이묘"로서의 격식에 걸맞은 지출(에도 재부 시의 격식에 맞는 지출, 산킨코타이의 규모 등)을 강요받게 되었다. 더욱이 잇따른 개혁과 에조치 경비 등에서 지출이 막대하게 되어,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영민에게 중세를 강요했기 때문에, 분카 10년(1813년)에 민지로 일규가 일어났다. 분카 8년 12월 18일(1812년), 에조치 경비의 공적으로 종4위하로 승진, 10만 석으로 다카오시되었다.
분세이 4년(1821년)에는 가격이 모리오카 번보다 상승한 것을 시기하여, 모리오카번 관계자에 의한 소마 다이사쿠 사건이라고 불리는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분세이 8년(1825년) 4월 10일에 가독을 차남 노부유키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향양관·광주라고 칭했다. 이후에는 하이쿠를 즐겼으며, 뇨잔·세카쿠·고테이 라는 하이쿠 호를 남겼다. 덴포 4년(1833년) 6월 14일,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2. 1. 가문 계승
쓰가루 야스치카는 구로이시 번의 5대 번주인 쓰가루 아키타카의 장남이었다. 구로이시는 쓰가루 노부히라의 차남을 위해 만들어진 4,000 곡 규모의 하타모토 영지였다. 안에이 7년(1778년) 5월 6일, 야스치카는 구로이시 영지 4000석과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 텐메이 2년(1782년) 4월 16일, 본가 히로사키번 7대 번주 쓰가루 노부야스로부터 편휘를 받아 '''네이치카'''로 개명했다. 쓰가루 노부아키라가 179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야스치카는 주 쓰가루 가문에 그의 후계자로 추대되었고, 구로이시 영지는 야스치카의 장남에게 넘어갔다.[1]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인 알현을 했다.[1]2. 2. 번주 시대
쓰가루 노부아키라가 179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구로이시 번의 5대 번주 쓰가루 아키타카의 장남인 야스치카가 주 쓰가루 가문의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구로이시 영지는 야스치카의 장남에게 넘어갔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으로 알현했다.[1]야스치카는 재난에 취약한 번의 번영을 되살리기 위해 노부아키라가 시작한 많은 개혁을 시행했다. 여기에는 많은 사무라이들이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겸업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었으나,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1796년에는 번교인 ''케이코칸''을 설립했고, 1793년에는 큰 지진과 쓰나미가 번을 덮쳐 피해를 입었다.
1805년, 막부는 쓰가루 번에게 홋카이도, 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를 포괄하는 에조 지역 일부의 안보 유지를 책임지게 했다. 그 대가로 번의 고쿠다카는 7만 곡으로 증가했고, 1808년에는 10만 곡으로 더 증가했다. 1809년에는 구로이시가 정식 번으로 승격되었다. 야스치카는 종5위에서 종4위로 조정에서 승진했다.
그러나 수입 증가는 북부 섬의 광대한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주둔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지방 세금 인상으로 인해 1813년까지 광범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1820년, 야스치카는 예부경(''주주'') 칭호로 승진했는데, 이는 쓰가루의 라이벌인 모리오카 번의 난부 씨 사무라이들을 격분시켰다. 1821년에는 난부 사무라이가 야스치카를 암살하려 했던 소마 다이사쿠 사건이 발생했다.
1825년, 야스치카는 번의 통치를 차남에게 넘기고 은퇴하였다.
2. 3. 라이벌 관계와 은퇴
쓰가루 야스치카는 구로이시 번의 5대 번주인 쓰가루 아키타카의 장남이었다. 구로이시는 쓰가루 노부히라의 차남을 위해 만들어진 4,000 곡 규모의 하타모토 영지였다. 노부히라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과 결혼했으나, 도쿠가와 막부 수립 후 정치적인 이유로 그녀를 첩으로 강등시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재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인 쓰가루 노부요시가 후계자로 남았고, 이는 두 번째 부인인 쓰가루 노부후사의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한 오이에 소도로 이어졌다. 막부는 노부요시의 편을 들어주었고, 구로이시 영지는 노부후사와 그의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1]쓰가루 노부아키라가 179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야스치카는 그의 후계자로 주 쓰가루 가문에 추대되었고, 구로이시 영지는 야스치카의 장남에게 넘어갔다. 그는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인 알현을 받았다.
1820년 야스치카는 예부경(''주주'') 칭호로 승진했다. 그러나, 이 승진은 쓰가루의 라이벌인 모리오카 번의 난부 씨의 사무라이들을 격분시켰고, 1821년 난부 사무라이가 야스치카를 암살하려 했던 소마 다이사쿠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1]
1825년, 야스치카는 번의 통치를 차남에게 넘기고 은퇴하여 하이쿠 시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1833년 번의 에도 저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도쿄도 타이토구에 있는 신료인(칸에이지의 부속 사찰)에 있다.
3. 가계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쓰가루 노리타카 | |
어머니 | 구로다 나오즈미의 딸 | |
양아버지 | 쓰가루 노부아키 | |
정실 | 후쿠히메 | 스기우라 마사카쓰의 딸 |
장남 | 쓰가루 노리아키 | 1789년 ~ 1805년 |
차남 | 쓰가루 노부유키 | 1800년 ~ 1862년 |
측실 | 코엔인 | 이토 히데야스의 딸 |
측실 | 케이호인 | 히라누마 요시타카의 딸 |
측실 | 미쓰조인 | 이토야 코헤이의 딸 |
측실 | 하루노 | 이타쿠라야 쵸베의 누나 |
측실 | 타카세 | 바이게츠도의 숙모 |
생모 불명의 자녀 | (딸) | 안도 노부요시의 정실, 그 후 이타쿠라 카쓰모토의 계실, 그 후 이와키 타카요시의 계실 |
생모 불명의 자녀 | (딸) | 호리 나오오의 정실 |
생모 불명의 자녀 | (딸) | 모리 타다아키라의 정실 |
4. 주요 가신
직책 | 이름 |
---|---|
가로 | 쓰가루 겐모쓰 쓰가루 타노모 와타나베 쇼겐 |
성대 | 쓰가루 시키부 |
반토 | 니시타테 우젠 (요닌 겸무) 다카쿠라 로쿠로베 (용인 겸무) 쓰가루 우콘 미조에 덴자에몬 다케우치 겐타유 사와 요자에몬 사이토 코자에몬 호리 고자에몬 스기야마 하치고로 쓰가루 토시키 |
용인 (반토 겸무자 제외) | 와카마쓰 반타유 (정부) 다카스기 사헤에 가사하라 하치로베 (성사 겸무) 히라오카 군조 (정부, 소바요닌 및 부 겸무) 미쓰하시 사쥬로 (측용인 및 부 겸무) 안자이 스케시 (정부, 측용인 겸무) |
성사 (용인 겸무자 제외) | 가와이 한에몬 |
5. 편휘를 받은 인물
- 쓰가루 '''친'''아시 - 구로이시 쓰가루 가 사람이다. 친아버지는 구로다 나오타카이며, 친척 관계 때문에 장남 덴교가 요절한 후 양자가 되었다. 야스치카의 배려로 다이묘로 승격하여 구로이시 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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